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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세요

하나님 손에 온전히 붙들린 당신을 통해 부르신 자리에 기쁨이 넘치기를…

 2022-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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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생각지 못한 계획 #충만한 기쁨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아요.

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자 당대에 존경받던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그의 신학적 기준으로는 스데반의 죽음이 율법에 따른 합당한 처벌이었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얼마 뒤 사울은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스데반이 전했던 복음을 목숨 걸고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울도, 스데반도, 그 현장에 있었던 누구도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과정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워요.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주로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을 겨냥했고 이전의 박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초대교회 성도를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집단’으로 여겼어요. 예수님에 이어 스데반을 죽였던 터라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을 생각이었지요.

바로 그 중심에 사울이 있었어요. 박해의 결과로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지만,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었습니다.

2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어요.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받았기에 드러내고 우는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행위였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니고데모가 그 시신을 달라고 찾아간 것만큼이나요.

3 같은 시기에 사울은 이참에 교회를 모두 없애버리려고 날뜁니다. 집마다 찾아 들어가 남녀 구분 없이 끌어내어 감옥에 넣었지요. ‘잔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사나운 짐승이 고기를 찢다’라는 뜻이에요. 사울 특유의 열정으로 신념과 확신에 차서 살기등등하게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음이 나타나지요. 그의 신학으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사회악이었어요. 나중에 바울이 된 그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순간들을 떠올리면, 이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혀 두루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합니다. 그 무엇도 복음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스데반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을 위축시키기는커녕 그들 마음에 더 강한 불씨를 지펴 큰 확신을 심어주었지요. 세상 핍박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스데반이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이 일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행 1:8) 곧 이방지역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 하신 말씀의 성취였어요. 아마 성도들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문화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하므로 하나님이 강제로 흩으신 거지요.

우리도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 즐거워하지 말고 세상에 들어가 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이 강제로 흩으세요. 삶에 환란이 찾아왔다면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놓친 게 없는지 꼭 점검해보세요. 저는 이 과정에서 답을 찾을 때가 많아요. 환란은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새로운 시작임을 꼭 기억하세요. 물론 미리미리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적용하는 게 가장 좋겠지요.

5 예루살렘 교회의 일꾼 중 하나였던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원래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개돼지 취급했어요. 그 기원은 주전 7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 앗수르는 결혼을 통해 두 민족이 섞이게 하는 정책을 썼어요.

속국인 이스라엘은 이 정책을 따르면 많은 혜택을 받지만,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각오해야 했어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생명의 위협과 불이익 속에 살았지만, 친일파들은 잘 살았던 것처럼요. 이처럼 앗수르의 정책에 타협하여 두 민족의 통혼으로 태어난 혼혈인을 옛 수도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은 더 이상 사마리아인을 같은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광복 이후 친일파가 그랬듯 사마리아인도 경멸의 대상이었지요. 유대인은 사마리아 땅조차 밟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거치는 최단 거리 직선 코스를 두고 강 건너 베레아 지역으로 돌아갔지요. 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이 동참하려 했지만 거절당했어요. 이렇듯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적대적인 관계는 심각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한 거예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따른 거지요.

6 감사하게도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표징을 보면서 한마음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당시 표징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표시였기에 복음 전파에 큰 효과가 있었지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이어 성도인 빌립에게도 표징이 일어났어요.

7 사람에게 붙었던 악한 귀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고 중풍병자와 지체 장애인이 고침을 받았어요. 8 그 성에 큰 기쁨이 넘쳤지요. 이는 단순히 기적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임했음을 말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사마리아 땅을 묶고 있던 어둠의 사슬, 멸시와 핍박의 세력이 끊어지는 가슴 뜨거운 장면이지요.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요 8:32). 복음은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우리를 짓누르는 역사적 멍에와 중압감도 끊어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만나면 삶에 기쁨이 넘치지요. 이 놀라운 역사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는 길에 일어났어요.

저는 삼십 대 중반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경험한 큰 기쁨을 맛보았지요. 곧장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성경을 연구했고,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초창기에는 말씀 연구가 너무 재밌어서 신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길은 막으시고 기어이 사업 현장으로 등 떠미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왜 신학교에 가면 안 되는지 수없이 질문했습니다. 게다가 사업은 고난의 연속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한 사업 현장이야말로 말씀을 깊이 깨닫고 살아낼 수 있는 기회의 장임을 알았어요.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라는 것을요. 매일 새벽, 차디찬 예배당에 엎드려 더는 견딜 힘이 없다고 펑펑 울 때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새 힘을 주시고 일으켜주셨어요. 동시에 죽지 않을 만큼의 고난을 조금씩 늘려가셨지요.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한 걸음 한 걸음 주께 시선을 고정하고 가다 보니 어느새 걸을 줄도, 달릴 줄도 알게 되었어요.

스데반과 빌립은 평신도였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지요. 사마리아 땅처럼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할 어둠의 땅이 주변에 참 많아요. 일터에도, 가정에도요. 이 세상에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세요. 한 평신도를 통해 사마리아 땅에 기쁨이 넘쳤던 것처럼 하나님 손에 온전히 붙들린 당신을 통해 부르신 자리에 기쁨이 넘치길 소원합니다.

- 지남쌤 성경공부, 이지남

† 말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행전 20장 24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0장 15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디모데후서 4장 2절

† 기도
날마다 삶속에서 복음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고 믿지 않는 가족과 공동체,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 적용과 결단
평신도였던 스데반과 빌립이 한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공동체, 일터에서 복음과 기쁨을 전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