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요나서 4:9-11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니느웨 백성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요나의 마음이 너무 잘 이해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 해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들까지 구원하실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의 내적 갈등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요동치는 마음을 보시고 박 넝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십니다. 뜨거운 동풍과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고통스러워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 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는 뜨거움을 잠시 가려주는 박 넝쿨이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요나가 ‘크게 기뻐하였다’(욘 4:6)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벌레 하나가 그 박 넝쿨을 갉아먹었고, 다시 내리쬐는 볕 아래 앉은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탄식과 하소연까지 합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요나서 4장 9절 이하입니다.
요나의 시선은 자신의 편함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박 넝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선은 박 넝쿨도 벌레도 아닌 니느웨 사람들, 요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박 넝쿨을 지으신 분이며, 요나가 자족하던 박 넝쿨을 갉아먹을 벌레도 보내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요나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야 그의 정체성이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지자라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거부한다면 더는 선지자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여전히 니느웨의 중보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니느웨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만 하는 중보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요나의 정체성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절대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이 예뻐서, 그들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자들이라서, 그들이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을 일컬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이란 기준이 없는 자들, 상황에 따라서 휩쓸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말합니다. ‘분변하다’는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이는 창세기에서 ‘선(good)과 악(evil)을 알다’ 또는 ‘하나님을 알다’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이 지금 선과 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서는 4장 11절로 끝나지만,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께 계속 반문했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까?”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없지만, 하나님은 니느웨의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나라에는 자격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할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격 없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그들에게도 은혜는 주어지고 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배 속에서 구해주신 이유를 요나서 4장 10,11절에서 찾아보십시오. 요나도 사실 선지자로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욘 1:2).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향합니다. 요나 말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했던 이들이 또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지(야다) 못하던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이 세상의 최초의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함을 일구어갈 중보자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를 건지신 분은 여호와, 바로 그가 외면했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미 은혜를 경험한 요나였기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니느웨의 중보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어찌 요나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지금 니느웨에 있다면, 우리의 손과 발도 니느웨로 향하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 삶의 방향성입니다.
-지금, 다시, 중보기도, 이진황
† 말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 24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장 8, 9절
†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나를 향한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중보기도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임을 깨닫고 중보기도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중보기도를 계속 이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