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어려워서’ 못 읽는 게 아니다.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은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아닌 한글 성경이다.
초등 교육만 받은 사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분량도 ‘1,600쪽 정도’로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많다고 느낀다면 학창 시절 기말고사를 떠올려 보자.
한 과목 교과서가 이백 쪽 안팎이고,
여덟에서 열두 과목까지 몰아서 공부했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읽어낸 분량만 해도 천육백 쪽이 훨씬 넘는다.
또한 성경은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논리나 원리를 전문용어로 나열한 책이 아니다. 단지 천지창조부터 세상의 종말까지를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낸,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분명한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따라서 독서 능력이 떨어지거나 집중력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게 아니다.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 역시 이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성경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잘못된 출발선’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책’으로만 여긴다.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신앙인이면 당연히 읽어야 하니까 하루 몇 장씩 정해서 읽으려 한다. 그러나 해야 할 일로 여기는 순간, 성경 읽기는 부담스러운 숙제가 된다. 그리고 결국 멈추게 된다.
성경은 억지로 읽어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 읽기의 본질은 마음을 드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읽기 성취’라는 성과를 향한 출발선은 잘못된 방향성이다. 올바른 성경 읽기의 첫걸음은 읽는 기술이나 속도, 분량을 정하는 게 아니라 출발선을 제대로 설정하는 데 있다.
성경을 읽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가장 단순한 진실에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는 끝까지 읽는다. 그 내용이 지루해도,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아무리 바빠도, 한 자 한 자를 여러 번 읽고 곱씹는다. 그와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성경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어려운 고전, 종교적 의무, 지루한 숙제로 느껴질 뿐이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하나님은 내 아버지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그분을 밀어내며 하나님 없는 신앙생활을 한다.
주일에는 “아멘”을 외치지만, 평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줄도 찾지 않는다.
기도 시간에는 “주님, 사랑합니다!”를 외치지만, 일상에서는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가깝지 않으면, 성경을 펼치는 게 이상하리만치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읽으려 하다가도 ‘이걸 왜 해야 하지? 굳이 지금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면 ‘다음에 읽어야지. 지금은 바빠서 안 돼. 언젠가 마음이 생기면 그때 시작하자’ 하며 미룰 이유를 찾거나 스스로 위안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 없이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성경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펼치는 책이다. 관계가 친밀할 때는 그분의 음성이 궁금해서라도 펼치지만, 관계가 식으면 그분의 음성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당신은 어떤가?
입술의 고백과는 달리, 하나님이 너무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성경을 읽으려는 마음이 식는 이유는 그 내용이 지루하거나 삶이 바빠서가 아니라 그분을 향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자유민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행 6:9). 그들은 로마 사회와 헬레니즘 문화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그들에게 모세는 신앙의 토대였고, 율법은 삶의 보호막이었으며, 성전은 생존의 중심 처소였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존재가 근본부터 뒤흔들렸다(행 7:48).
자유민들은 스데반의 말이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행 6:10). 그러나 듣는 순간, 자신들의 정체성과 한 세기 가까이 지켜온 ‘자유민’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져 내렸다.
자유민들은 자기 존재를 근본부터 뒤집는 이 말씀을 받아들일지 말지,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회개해라”, “너희 의를 죽여라” 명령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했다. 틀린 말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스데반을 모함하고 죽이는 작전을 펼쳤다(행 6:11–13).
성경을 읽을 때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 존재를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평생 쌓아온 삶의 구조를 통째로 무너뜨린다. 죄 된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롭게 한다.
성경은 영혼 깊숙이 날아와 꽂히는 하나님의 검이다 (히 4:12). 그래서 불편하다. 좋은 말만 해주는 책도, 취향껏 골라 읽어도 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고 마음에 감춰둔 죄와 욕망, 변명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존재 근원부터 뒤집어엎으려고 서슬 퍼렇게 달려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을 요구한다(롬 6:3-5).
성경을 펼치면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압도된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듯한 부담이 밀려온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이 부분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멈추고 싶어진다. 나를 바꿔야 할 것 같으니까, 내 욕망을 포기해야 할 것 같으니까, 말씀을 통해 나를 바꾸실 하나님이 두렵고 내가 붙들고 싶은 걸 포기하게 하실까 봐 겁이 난다.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준비되면 시작하자’라며 핑계를 댄다. 더 나아가 자유민들이 스데반을 모함했듯이 성경을 모함한다.
“성경은 사역자나 들고 파야 하는 어려운 책이야.
내겐 성경을 읽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
죄 된 자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죽인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쇼츠만 한없이 본다.
성경은 불편한 책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불편함을 알기에 무의식적으로 성경을 피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하는 순간, 말씀은 더 이상 나를 살리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 회개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의 불편함을 오히려 반겨야 한다. 내가 아직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지 않는 또 하나의 벽은,
말씀 앞에서 ‘나는 괜찮아’라고 스스로 속이는 자신이다. ‘나’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하나님의 손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살리는 손길이기 때문이다.
- 헤브론 성경통독, 송준기
† 말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요한복음 8:47
† 기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나의 삶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 본적이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 나의 온 마음을 드려 하나님과 대화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시간 갖게 하여 주세요. 하나님과 대화 중에 내 마음이 불편해지더라도 나를 살리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 알아 회개하고 주님만 따르는 자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드는 시간을 정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 따르며 회개하고 씨름하는 하루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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