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에 장학금을 탈 수 있는 일은 피 터지게 경쟁해서 다 해야만 했다.
기숙사 청소, 도서관 청소, 사생회장, 원우회장까지 역임하며 그 덕에 온갖 감투라는 것은 다 써보았다. 내 사정을 모르는 동기생들은 나더러 감투 욕심이 많다고 말했지만 나는 설명할 여력도 없었고, 묵묵히 듣고 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여전히 부족한 생활비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담보대출 이자를 낼 여건이 되지 않아,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다. 단돈 10만 원도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넘어간 집에서 3개월 정도를 버티고 버텼다.
집을 경매로 산 사람이 찾아와서 70만 원 줄 테니까 집에서 나가달라고 했다. 어차피 집은 넘어갔고, 그래도 70만 원이라도 줄 때 받아서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집을 구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가족이 갈 곳은 없어 보였다.
한 지인이 영월 철길 옆 옥탑방을 보증금 300만 원에 30만 원 월세로 알아봐 주었다. 우리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 분은 300만 원을 빌려줄 테니 우선 급한 대로 이사부터 하라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이삿짐 차를 빌렸다.
포장이사는 비싸니까 우리 부부가 울며불며 짐을 쌌다. 그런데 이사 당일인 5월 16일, 문제가 발생했다. 학교에 결석하고 이사를 하는 중에 그의 연락을 받았다. 빌려주기로 한 돈 300만 원을 줄 수 없다는 통보였다.
아내가 알게 되었는데 빌려주면 절대로 못 받는다고 했다며 미안하다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너무도 당황해서 전화를 여러 번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더니 이내 전화기마저 꺼버렸다. 이삿짐 차에 짐을 싣던 중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월셋집 주인에게 보증금을 며칠 안에 내고 우선 짐부터 내리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지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이삿짐 차 사장님에게 오늘 짐을 못 내리게 됐다고 말하고, 하루에 10만 원씩 보관료를 내고 우선 차에 짐을 보관하기로 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들이 학교 끝나면 이사 가기로 한 집으로 오기로 했는데 그 밤에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참 난감했다.
이런저런 사정들이 얽혀 있다 보니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미처 못 챙긴 짐이 있다는 핑계로, 짐을 빼서 이미 텅 빈 집,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실까?
왜 이런 상황에서 버려두실까?'
아내와 나는 아이들을 붙잡고 한참을 울어야만 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도 못 가고 돈을 빌리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이 없는 교회 전도사라는 것을 알고 다 거절당했다.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눈물이 났다. 그렇게 어떤 돈을 빌려주는 분에게 각서를 받고 높은 이자에 300만 원을 빌렸다. 간신히 철길 옆 옥탑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학부 때 어렵게 공부를 하는 중에 나는 교육전도사를 사임하고 말았다. 자신이 없었다.
나의 사정으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중고등부 학생들 앞에서 설교할 자신도 없었고, 찬양 인도도 늘 부담이 되었다.
'너나 잘하세요! 예수 믿는 게 왜 저래? 네가 전도사야?' 그런 시선이 늘 힘들었다.
사임하고 나니 그나마 받던 사례비도 끊기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중에도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버텨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내는 자신도 힘들고 지칠 텐데 나를 위로한답시고 자신은 괜찮다고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힘을 내어 그것을 오버하면서 보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따라 아이들도 "아빠, 우리는 괜찮아요", "엄마,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나님 백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라며 우리를 응원했다.
아직 초등학생인 첫째 솔이가 "하나님이 계시니까 꼭 좋은 날이 있을 거예요. 열심히 공부해서, 아빠 아프니까 내가 간호사 돼서 치료해줄게요."라며 나를 위로하고, 동생 병권이도 "아빠, 내가 커서 엄마랑 아빠랑 비행기 태워줄게요."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꿈은 자연스럽게 간호사와 항공사 직원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고맙고, 이토록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만지시고 직접 키워주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했다.
나중에 아내는 그런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겠냐고, 그래서 힘들어도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매일의 삶이 너무도 힘에 겨웠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람들을 보내어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를 베푸시며 여전히 나를 잊지 않으셨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새벽기도 때 무릎 꿇고 기도하며 울고 있던 내 앞에 10만 원이 든 봉투 하나를 조용히 두고 가시던 최 권사님, 끼니를 걱정하던 때 푸드뱅크를 통해 들어온 빵과 식재료를 보내주신 장로님.
사회복지회 사역을 하시던 한 장로님은 내가 차 기름값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때, 거래하던 주유소에서 이름만 적고 기름을 넣게 하시고는 몇 번을 대신 계산해주곤 하셨다.
학부 4년을 하나님 은혜로 간신히 마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후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환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려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래도 주의 일을 감당하기로 했다. 다행히 기존에 섬기던 교회에서 배려해주셔서 다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그 10년이다.
그러나 마치 광야의 삶인 듯 그만큼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만큼 하나님께 매달리고 부르짖었던 때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를 입은 때도 없었던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보내셔서 순종한 덕천리에서도 사역할 수 있는 것 같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신명기 8:3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사역을 놓고 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주옵소서! 그곳이 어디든지,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복음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해서 개척을 하든, 후임 청빙을 받든, 목사고시를 마치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최기수
† 말씀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시편 62: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 나훔 1:7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 디모데전서 5:5
† 기도
주님. 폭풍속에서는 주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주님의 섬세한 도우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가겠다고 결단하며, 주님의 뜻을 구한 목사님의 마음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어떤 상황이든지, 또 결정을 놓고도 주님께 기도하며 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수많은 일들로 걱정하고 계신가요? 그러나 기억하세요.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합당한 분량의 기도를 쌓으며, 주님의 뜻을 구합시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사 순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구합시다.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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