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브엘세바에서 벧엘, 천국의 사다리에서 라반의 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 안팎을 이리저리 넘나들었다. 남을 속였고 자기도 속았다.
천사를 두 번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 들었다(창 28:15; 32:28; 35:10 참조). 이름이 바뀌었지만 마음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은 왜 그를 버리지 않으셨을까? 좀 더 교양 있고 세련된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건 어땠을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서 참 감사하다.
나 역시 편법을 쓰고 세겜의 그늘에 장막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나의 힘과 근육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생각으로 하나님과 씨름했다. 나도 가식적이고 비굴하며 솔직하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야곱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나도 절뚝거린다.
나는 성경 속 다른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요셉과 다니엘은 신동이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사람들이다. 사도 요한과 마리아는 현자와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가? 그에게는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을 닮은 구석이 있다. 루시가 찰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기억하는가?
“찰리 브라운, 넌 야구로 치면 인생이라는 직선타에서 파울볼이야!
축구로 치면 넌 너희 팀 골대 앞을 못 떠나지!
당구로 치면 큐 미스고, 골프로 치면 18번 홀의 3퍼트야!
볼링으로 치면 열 번째 프레임에서 7번과 10번 핀이 남은 꼴이지! 낚시로 치면 낚싯대와 낚싯줄을 호수에 빠뜨린 격이고! 넌 자유투에 실패했고, 9번 아이언 뒤축으로 공을 쳤고,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루시가 야곱은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야곱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있는 야곱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겠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위해 존재한다.
그 대답은, 위안을 주며 울려 퍼지는 대답은, “그렇다”이다.
순전한 은혜다.
은혜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뜻이다. 우리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따라 우리를 대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 아들을 보시겠다는 뜻이다. 그 어떤 죄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우리 곁에 함께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 하지 않고 그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 누구에게든 하늘 문을 활짝 여시겠다는 뜻이다.
놀라운 은혜 아닌가!
하나님은 사다리 위에 서셔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분을 찾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광야에 사다리를 내리고 우리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게 굴어야만 우리를 사용하겠다고 제안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은혜는 세겜의 그늘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굽어보시는 하나님.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당신은 이 은혜를 아는가?
당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보지 않겠는가?
-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맥스 루케이도
† 말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4장 7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 23-24절
† 기도
하나님, 오늘도 저의 삶의 광야에 사다리를 직접 내리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사랑으로 야곱과 같은 저와 늘 함께하여 주십시오. 모든 순간이 주님의 은혜임을 입술로 고백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적용과 결단
강해야만, 완벽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하게 망가진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질그릇의 힘이 아닌,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힘임을 기억합시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는 당신이 되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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